장충단 공원으로 설레는 맘을 안고 출발했다.
장충정과 장충교회 풍경 - size A5 종이에 펜과 수채
장충정이 보이는 길가에 자리잡고 그린 장충교회가 보이는 풍경이다
태극당 밑의 커피빈의 뜨락풍경 size 175*250mm 종이에 펜, 수채
태극당 밑의 커피빈 담너머 풍경 size 175*250mm 종이에 펜, 수채
장충단 - 조병옥 20만, 김대중 100만 연설... 6~70년대 단골 집회현장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공원은 우리나라 근현대사가 응축된 곳이다.
장충단공원은 이곳에 장충단(奬忠壇)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장충단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을 제사하기 위해 1900년 세운 제단으로
오늘날의 국립묘지와 같다.
명성황후 시해 때 주변을 지키다 순국한 시위대상 홍계훈, 영관 염도희 이경호를 비롯,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신주로 모셨다.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0년 장충단을 폐사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벚꽃을 심고 장충단공원으로 바꿔버렸다.
우리나라를 강제 합병한 일제는 1910년 장충단을 폐사하고, 1920년대 후반부터 벚꽃을 심고 장충단공원으로 바꿔버렸다.
이후 상해사변 당시 일본군인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의 보리사(菩提寺, 선조 대대 위패를 모신 곳)인 박문사가 세워졌다.
해방 뒤 일제 흔적은 모두 지워졌으나 지리상 이점 때문에 장충단 공원은 계속 수난을 겪었다.
1962년 공원 자리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들어선 것을 비롯해, 중앙공무원 교육원(1963년),
장충체육관(1963년), 재향군인회 건물(1968년), 국립극장(1973년), 신라호텔(1975년) 등이 들어서면서
1940년 지정 당시 41만8000㎡였던 공원 면적은 1984년 29만7000㎡(약 90만평)로 줄어들었다.
과거 100만 명이 모여 시국강연을 들었다는 위용은 그렇게 과거가 돼 버렸다.
또 장충동엔 조선시대 유적으로 수표교(水標橋)가 있다
세종 23년(1441) 청계천 물높이를 재기 위해 만든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2가에 있었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신영동으로 옮겼다가 1965년 지금 자리에 설치했다.
수표교 옆에 있던 수표(水標)는 동대문구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관에 있다.지금은 기념관이있어 당시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다.
어반 스케치를 하면서
세상엔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이야기를 화면에 담는 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상을 해본다.
다음번을 기내하면서
오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기대에 설렌다.